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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건빌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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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건빌 내전은 1988년 부건빌섬에서 팡구나 광산을 둘러싼 갈등으로 시작되어 1997년까지 이어진 분쟁이다. 1930년대 금광 발견과 1960년대 구리 매장으로 대규모 광산이 개발되면서, 외부 노동자 유입, 환경 오염, 수익 배분 문제를 겪었다. 1988년 분리주의 내전으로 격화되어 파푸아뉴기니 정부와 부건빌 혁명군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호주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개입과 봉쇄 조치, 샌드라인 사건 등 혼란을 겪었다. 1997년 휴전 이후 평화 협상을 통해 2001년 부건빌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2019년 독립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을 결정했고, 2027년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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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푸아뉴기니의 분리주의 - 부건빌 자치주
    부건빌 자치주는 파푸아뉴기니 동부에 위치한 자치주로, 구리 광산 개발 문제와 독립 운동을 거쳐 2019년 독립을 결의하고 2027년 완전한 독립을 목표하며 현재 자치 정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부건빌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부건빌 내전
시기1988년 12월 1일 – 1998년 4월 20일
장소부건빌 자치주
솔로몬 제도
파푸아뉴기니
솔로몬해
결과군사적 교착 상태
부건빌 평화협정 체결
부건빌 자치정부 수립
2027년경 부건빌 독립 예정
교전 세력
교전국 1파푸아뉴기니
부카 해방전선
부건빌 저항군
지원국 1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교전국 2부건빌 임시 정부
부건빌 혁명군
지원국 2솔로몬 제도
피지 (추정)
지휘관
지휘관 1줄리우스 찬
제리 싱기로크
파이아스 윙티
빌 스케이트
래비 나말리우
지휘관 2프랜시스 오나
샘 카우오나
시어도어 미리웅
이슈마엘 토로아마
조세프 카부이
병력 규모
병력 1~800명 (군인)
150명 (경찰)
수천 명 (저항군)
벨 UH-1 이로쿼이 헬리콥터 4대
퍼시픽급 경비정 4척
병력 2~2,000명
사상자
사상자 1300명 이상 (파푸아뉴기니군 사망)
수천 명 (부상)
사상자 21,000–2,000명 (전투원 사망)
사상자 315,000–20,000명 (부건빌 주민 사망 추정)
기타 정보
부건빌 행정구역도
부건빌(북솔로몬주) 행정구역도

2. 역사적 배경 (1930년~1988년)

부건빌파푸아뉴기니자치주로, 부건빌과 부카 및 여러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리적으로는 솔로몬 제도에 속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독립 국가인 솔로몬 제도와 분리되어 있다. 부건빌은 1800년대 후반부터 독일 제국보호령이었던 독일령 뉴기니의 일부였으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오스트레일리아에 점령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령 뉴기니에 대한 국제 연맹 위임 통치를 부여받았다.[3] 오스트레일리아 통치 하에 1930년 부건빌에서 처음으로 맥금이 발견되었고,[18] 1960년대 부건빌 섬의 크라운 프린스 산맥에서 거대한 구리 광석 매장량이 발견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회사인 콘진크 리오 틴토에 의해 거대한 팡구나 광산이 건설되었다. 1972년, 팡구나 광산은 부건빌 구리 유한회사의 관리하에 생산을 시작했으며,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20%의 주주로 참여했다. 당시 팡구나 광산은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광산이었으며, 파푸아뉴기니의 수출 수입의 45% 이상을 생산하여 국가 경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팡구나에서 광산 운영이 시작되면서 수천 명의 이주 노동자가 섬으로 유입되면서 부건빌에서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은 본토 출신의 파푸아뉴기니인으로, 부건빌인들은 이들의 피부색 때문에 "붉은 피부"라고 불렀다. 반면, 섬의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스스로를 "검은 피부"라고 정체화했다. 대부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의 "백인"들도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왔다. 부건빌인들은 이주 노동자, 특히 집단 간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불만을 품었던 "붉은 피부"를 원치 않았다.[4] 많은 지역 토지 소유주들은 이민 노동자의 유입, 부정적인 환경 영향, 그리고 광산의 대부분의 이윤이 섬을 떠나는 것에 반대했다. 1975년 파푸아뉴기니 독립 이전, 부건빌 섬은 파푸아뉴기니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시도했지만, 대표자들이 오스트레일리아 행정부와 추가적인 분권화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여 당시의 우려를 해소했다.[19]

2. 1. 초기 광산 개발과 갈등의 씨앗

1930년대 부건빌섬에서 처음으로 금 광맥이 발견되었다.[18] 1960년대에는 부건빌섬의 크라운프린스 산지에서 막대한 양의 구리가 발견되어 오스트레일리아 회사 리오 틴토가 거대한 구리 광산을 만들었다. 팡구나 광산은 부건빌 구리 유한회사의 관리 아래 1972년에 가동을 시작했다.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건빌 코퍼 주식회사 지분의 20%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에 팡구나 광산은 세계 최대의 노천 광산이었고, 파푸아뉴기니 총 수출액의 45% 이상을 차지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다.[18]

수천 명의 광산 노동자가 부건빌섬으로 이주해 왔다. 그 대부분은 파푸아뉴기니인이었으며 부건빌 주민들은 이 노동자들을 ‘붉은 피부’라고 불렀다. (반면에 부건빌 주민들은 대체로 자신이 검은 피부라고 여긴다.)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인이었던 ‘흰 피부’들도 광산에 일하러 왔다. 부건빌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에 임시 이주자나 영구 이민자들이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자신들과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붉은 피부’들을 특히 불쾌하게 여겼다.[19]

팡구나 광산이 가동을 시작하자마자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지역 지주 중 다수는 파푸아뉴기니의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유입되는 것 때문에 광산을 반대했다. 또한 환경 오염 문제와 광산에서 나오는 수익의 대부분이 섬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문제를 우려했다. 1975년에 파푸아뉴기니가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부건빌은 파푸아뉴기니에서 분리 독립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부건빌 대표들은 보다 탈중앙집권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파푸아뉴기니 정부와 협의하여 이러한 우려를 잠재웠다.[19]

2. 2. 분리 독립 운동의 태동

1930년에 부건빌섬에서 처음으로 금 광맥이 발견되었다.[18] 1960년대에는 부건빌섬의 크라운프린스 산지에서 막대한 양의 구리가 발견되어 오스트레일리아 회사 리오 틴토가 거대한 구리 광산을 만들었다. 팡구나 광산은 부건빌 코퍼 주식회사의 관리 아래 1972년에 가동을 시작했다.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건빌 코퍼 주식회사 지분의 20%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에 팡구나 광산은 세계 최대의 노천굴 광산이었고, 파푸아뉴기니 총 수출액의 45% 이상을 차지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다.[18]

수천 명의 광산 노동자가 부건빌섬으로 이주해 왔다. 그 대부분은 파푸아뉴기니인이었으며 부건빌 주민들은 이 노동자들을 ‘붉은 피부’라고 불렀다. 반면에 부건빌 주민들은 대체로 자신이 검은 피부라고 여겼다.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인이었던 ‘흰 피부’들도 광산에 일하러 왔다. 부건빌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에 임시 이주자나 영구 이민자들이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자신들과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붉은 피부’들을 특히 불쾌하게 여겼다.[19]

팡구나 광산이 가동을 시작하자마자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지역 지주 중 다수는 파푸아뉴기니의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유입되는 것 때문에 광산을 반대했다. 또한 환경 오염 문제와 광산에서 나오는 수익의 대부분이 섬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문제를 우려했다. 1975년에 파푸아뉴기니가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부건빌은 파푸아뉴기니에서 분리 독립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부건빌 대표들은 보다 탈중앙집권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파푸아뉴기니 정부와 협의하여 이러한 우려를 잠재웠다.[19]

3. 분리주의 분쟁 (1988년~1997년)

1988년 부건빌 혁명군(BRA)의 봉기와 파푸아뉴기니 정부군의 진압 작전으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20] 파푸아뉴기니 병력과 부건빌 혁명군 양측은 전투 중 부건빌 주민에 대한 폭력이 발생했다고 보고했으며, 분쟁은 점차 분리주의 내전으로 발전했다. 광산 회사는 광산을 폐쇄했고, 많은 비(非)부건빌인들이 섬을 떠났다. 1년 동안 이어진 분쟁에서 마을 방화와 같은 인권 유린이 만연했다고 전해진다.[20]

1990년 초, 파푸아뉴기니 병력이 철수하면서 부건빌섬은 부건빌 혁명군의 통제하에 들어왔다.[20] 프랜시스 오나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부건빌 임시정부(BIG)를 수립, 스스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조세프 카부이가 부통령, 샘 카우오나가 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부건빌 임시정부는 큰 권력을 가지지 못했고 섬은 혼란에 빠졌다.[20] 부건빌 혁명군 내 라스콜 폭력 조직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무기를 이용해 테러를 자행했고, 분쟁은 민족, 분리주의적 성격을 띠며 파벌로 나뉘었다.[20]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건빌을 봉쇄했고, 오스트레일리아 지원 헬기와 경비정이 동원되었다. 호주는 파푸아뉴기니 군경에 물자, 훈련 등을 지원했으나, 파푸아뉴기니는 헬기를 무장해 사용했다.[20]

분쟁은 씨족 간 경계와 일치했고, 부건빌 임시정부는 70~80개 부족 갈등도 상대해야 했다. 나시오이 씨족 중심의 부건빌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부카섬에서는 민병대가 조직되어 파푸아뉴기니군과 함께 부건빌 혁명군을 몰아냈다.[22] 1990년 말, 파푸아뉴기니군은 부카섬, 부건빌 혁명군은 부건빌 나머지를 통제했다. 초기 평화 시도는 실패했고, 부건빌 혁명군 지도부는 내분을 겪었다. 파푸아뉴기니 정부 지지 민병대('저항운동')가 조직되어 부건빌 혁명군을 몰아냈다.[22] 1991년~1992년, 파푸아뉴기니군은 부건빌 북부와 서남부를 장악했다.[22]

1992년 파푸아뉴기니 정권 교체 후 파이아스 윙티 수상은 강경책을 폈다. 파푸아뉴기니군은 솔로몬 제도를 공격해 외교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22] 1993년 아라와 탈환 후, 윙티는 팡구나 광산 탈환을 명령했으나 실패했다. 1994년 줄리우스 찬이 수상이 되어 평화 해결을 모색, 남태평양 평화유지군 경비 하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으나 부건빌 임시정부 측 거부로 무산되었다.[23] 테오도르 미리웅 주도로 1995년 부건빌 과도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경파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23]

1995년~1996년 협상 결렬 후, 부건빌 혁명군 측은 파푸아뉴기니군 공격을 받았고, 솔로몬 제도 대표 집이 폭격당했다. 부건빌 혁명군은 보복했고, 찬은 1996년 휴전 종료, 군사 해결을 선언했다.[23]

3. 1. 부건빌 혁명군(BRA)의 봉기

1988년 말, 팡구나 광산을 둘러싼 긴장감은 부건빌에서 지역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경찰 기동대와 군대를 투입했다.[20] 처음에는 광산 지역 주변으로 제한되었지만, 이후 갈등이 심화되었다.[20] 정부군과 부건빌 혁명군(BRA) 반군 양측 모두 원주민에 대한 학대를 보고했으며, 이 갈등은 분리주의 반란으로 발전했다. 광산 회사는 광산을 폐쇄했고, 많은 비(非)부건빌인들이 섬을 떠났다. 전투는 1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마을이 불타는 등 광범위한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고 주장되었다.[20]

프랜시스 오나는 무장 해제와 협상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 5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20] 그는 부건빌 임시 정부(BIG)를 설립하고 스스로를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전 지방 정부 총리인 조셉 카부이는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20] BRA의 군사 사령관은 전 파푸아뉴기니군 장교인 샘 카우오나였다.[20] 그러나 부건빌 임시정부는 거의 권한이 없었고, 섬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20] BRA가 구축한 지휘 구조는 BRA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섬 전역의 다양한 집단에 대해 거의 실제적인 통제력을 갖지 못했다.[20] BRA와 연계된 다수의 라스콜 갱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에서 회수된 무기를 사용하여 마을을 공포에 떨게 했고, 살인, 강간, 약탈을 저질렀다. 부건빌은 분열되었고, 갈등은 민족적 및 분리주의적 특징을 띠게 되었다.[20]

1990년 초, 파푸아뉴기니군이 철수하면서 부건빌은 BRA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20]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이후 부건빌에 봉쇄를 가했다.[20] 이 봉쇄는 1994년 휴전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부건빌 일부 지역에서는 1997년까지 비공식적으로 지속되었다).[20]

3. 2. 파푸아뉴기니 정부군의 대응과 민간인 피해

1988년 말, 광산을 둘러싼 긴장감은 부건빌에서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경찰 기동대와 파푸아뉴기니 방위군(PNGDF) 병력을 투입하여 진압 작전을 펼쳤다.[20] 처음에는 광산 지역 주변으로 제한되었지만, 이후 갈등이 심화되었다.[20] 파푸아뉴기니 병력과 부건빌 혁명군(BRA) 양측 모두 전투 중 부건빌 주민에 대한 폭력이 발생했다고 보고했으며, 이 갈등은 분리주의 내전으로 발전했다.[20]

이 과정에서 파푸아뉴기니 정부군에 의해 마을이 불타는 등 광범위한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고 알려진다.[20] 1990년 초 파푸아뉴기니 병력이 철수했고, 부건빌섬은 부건빌 혁명군의 통제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20]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건빌을 봉쇄했고,[21] 이 봉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원받은 UH-1 이로쿼이 헬리콥터와 퍼시픽급 경비정이 동원되었다.[5] 호주는 파푸아뉴기니군의 전력 육성을 위해 화기, 탄약, 군수, 훈련, 특수·기술 고문 및 인력을 지원했다.[20] 경찰도 비슷한 종류의 지원을 받았다.[20]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전투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헬리콥터를 지원했지만 파푸아뉴기니군은 이를 어기고 기관총을 장착해 사용했다.[21]

3. 3. 국제사회의 개입과 봉쇄 조치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건빌에 대한 봉쇄 조치를 시행했다.[20] 이 봉쇄에는 1980년대 후반, 독립 이후 진행된 국방 협력 계획의 일환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지원한 UH-1 이로쿼이 헬리콥터와 퍼시픽급 경비정이 동원되었다.[20] 오스트레일리아는 파푸아뉴기니 군경의 전력 육성을 위해 화기, 탄약, 군수, 훈련, 특수·기술 고문 및 인력을 지원하며 간접적으로 개입했다.[20]

당시 파푸아뉴기니군과 계약을 맺은 사기업이 헬리콥터를 관리·운용했으며,[21]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국적의 민간인 조종사가 조종했다는 보고가 있다.[21] 오스트레일리아는 전투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헬리콥터를 지원했지만, 파푸아뉴기니군은 이를 어기고 기관총을 장착해 사용했다.[20] 봉쇄는 1994년 정전 시까지 유지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1997년까지 비공식적으로 계속되었다.[20]

3. 4. 내전의 격화와 혼란

1988년 후반, 광산을 둘러싼 갈등으로 부건빌섬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경찰 기동대와 군대를 투입했지만, 사태는 광산 주변 지역을 넘어 점차 격화되었다.[20] 파푸아뉴기니 병력과 부건빌 혁명군(BRA) 양측은 전투 중 부건빌 주민에 대한 폭력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분쟁은 점차 분리주의 내전으로 발전했고, 광산 회사는 광산을 폐쇄했으며, 많은 비(非)부건빌 주민들이 섬을 떠났다. 1년 동안 이어진 분쟁에서 마을 방화와 같은 인권 유린이 만연했다고 전해진다.[20] 1990년 초, 파푸아뉴기니 병력이 철수하면서 부건빌섬은 부건빌 혁명군의 통제하에 들어왔다.[20] 부건빌 혁명군의 수장 프랜시스 오나는 무장 해제와 협상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 5월에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22]

이에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건빌을 봉쇄했다.[20] 봉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원받은 UH-1 이로쿼이 헬리콥터와 퍼시픽급 경비정이 동원되었다.[20] 호주는 파푸아뉴기니군의 전력 육성을 위해 화기, 탄약, 군수, 훈련, 특수·기술 고문 및 인력을 지원했고, 경찰도 비슷한 지원을 받았다.[20]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전투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헬리콥터를 지원했지만, 파푸아뉴기니군은 이를 어기고 기관총을 장착해 사용했다.[20] 봉쇄는 1994년 정전 시까지 유지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1997년까지 비공식적으로 계속되었다.[22]

그 뒤 프랜시스 오나는 부건빌 임시정부(BIG)를 수립하고 스스로 대통령으로 임명했으며, 부통령에는 구 지방정부의 주지사였던 조세프 카부이가 임명되었다.[22] 부건빌 혁명군의 지휘관은 과거 파푸아뉴기니군 장교였던 샘 카우오나였다.[22] 그러나 부건빌 임시정부는 큰 권력을 지니지 못했고, 부건빌섬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22] 부건빌 혁명군의 지휘 체계는 섬 안의 다양한 집단을 통제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22] 부건빌 혁명군에 속한 몇몇 ‘라스콜’ 폭력 조직제2차 세계 대전에서 쓰였던 무기를 노획하여 무장한 채 살인, 강간, 약탈을 저질러 마을에 테러를 자행했다. 분쟁이 민족적·분리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면서 부건빌은 여러 파벌로 쪼개졌다.[22]

분쟁 세력 간의 경계는 대체로 씨족 간의 경계와 일치했다. 부건빌 임시정부는 봉쇄뿐만 아니라 70~80개의 사소한 부족 간 갈등도 상대해야 했다.[22] 나시오이(Nasioi) 씨족이 부건빌 임시정부와 부건빌 혁명군의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다른 주민들, 특히 북부 주민들은 그 목표를 의심했다.[22] 부건빌 북쪽의 부카섬에서는 지역 민병대가 형성되어 파푸아뉴기니 병력의 도움을 받아 9월에 부건빌 혁명군을 섬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22] 1990년 말에는 파푸아뉴기니군이 부카섬을 통제하고 부건빌 혁명군이 부건빌의 나머지를 통제했다.[22] 갈등을 해결하려던 초기의 시도로 1990년1991년에 조약이 맺어졌지만, 양측 모두 조약을 지키지 않았다.[22] 한편 오나와 카우오나의 부건빌 혁명군 지휘 체계는 카부이 등 몇몇 정치적 지도자들과 함께 힘을 잃었다.[22] 파푸아뉴기니 정부를 지지한 여러 마을 민병대가 생겨나 ‘저항운동’(레지스탕스)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들은 파푸아뉴기니군에 의해 무장되어 자신들의 영역에서 부건빌 혁명군을 몰아냈다.[22] 1991년에서 1992년 사이에 파푸아뉴기니군은 점차 부건빌로 돌아왔으며, 부건빌섬의 북부와 서남부를 장악했다.[22]

1992년 선거로 파푸아뉴기니의 정권이 교체되고, 신임 수상 파이아스 윙티는 부건빌에 대해 한층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22] 1992년~1993년에 파푸아뉴기니군은 부건빌 혁명군의 지원자들을 좇아 허가 없이 국경을 넘어 솔로몬 제도의 영토를 습격했다. 이로 인해 솔로몬 제도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한번은 파푸아뉴기니군과 솔로몬 제도 경찰이 충돌하여 서로에게 발포하기도 했다. 또 파푸아뉴기니군이 오에마섬에 상륙한 일도 있었다.[22] 1993년 2월에 파푸아뉴기니군은 저항운동 세력과 함께 북솔로몬주의 주도인 아라와를 탈환했다.[22] 파푸아뉴기니 외무장관 줄리우스 찬은 태평양의 여러 국가로부터 평화유지군 병력을 끌어모으려 했지만, 윙티 수상은 이 제안을 파기했다. 윙티는 파푸아뉴기니 육군에 팡구나 광산을 탈환하라고 명령했으며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윙티 정부는 오래가지 못했고, 1994년 8월에는 줄리우스 찬이 그를 대신해서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22] 그 뒤 팡구나 공격은 실패했다.[22] 파푸아뉴기니군은 정글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고 경계가 어려운 섬의 내륙 지역에서 갈수록 큰 손실을 입었다.[22]

줄리우스 찬은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의사를 밝혔고, 9월에 솔로몬 제도에서 카우오나와 만나 휴전 협정을 맺었다. 양쪽은 10월에 아라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주도의 남태평양 평화유지군이 경계하는 가운데 평화 협정을 맺기로 협의했다.[23] 그러나 부건빌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본인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협정을 보이콧했다.[23] 프랜시스 오나가 부재한 가운데 카부이와 카우오나는 보다 온건한 부건빌 혁명군 지도자로 떠올랐다.[23] 그 뒤 줄리우스 찬 정부는 나시오이 씨족의 추장 집단과 협상에 들어갔다. 추장 집단의 대표는 과거 팡구나 지주 조합의 변호사였던 테오도르 미리웅이 맡았다. 이 협상을 통해 1995년 4월에 부카를 수도로 하는 부건빌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23] 미리웅은 부건빌 과도정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지만, 결국은 “양쪽의 강경파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했다”.[23]

그동안 줄리우스 찬은 상황이 진전되지 않는 데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다.[23] 1995년 9월과 12월 호주 케언스에서 열린 부건빌 혁명군, 부건빌 과도정부, 파푸아뉴기니 정부 간 협상 뒤, 1996년 1월에 카부이를 포함한 부건빌 혁명군 및 부건빌 임시정부 대표자들은 부건빌로 돌아간 뒤에 파푸아뉴기니군의 사격을 받았다.[23] 그 후에는 솔로몬 제도의 부건빌 임시정부 대표 마틴 미로리의 집이 폭격을 당했다. 이에 따라 부건빌 혁명군은 부건빌 북부와 부카에서 보복 행동을 취했다.[23] 줄리우스 찬은 평화 노력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1996년 3월 21일에 휴전 종료를 승인했다.[23] 이어서 그는 대국민 담화에서 군사적 해결을 이뤄내겠다고 약속하였다.[23]

3. 5. 샌드라인 사건

호주 정부가 직접적인 군사 지원을 거부하고 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옹호하자, 줄리우스 찬 총리는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1996년 3월,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런던에 본사를 둔 민간군사기업인 샌드라인 인터내셔널에 용병 고용을 시도하면서 샌드라인 사건이 시작되었다. 샌드라인 인터내셔널은 다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군사기업인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스에 용역을 주었다.

샌드라인과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파푸아뉴기니군은 부건빌에 대한 새로운 공격 작전을 시작했으나, 허술한 군수 계획과 부건빌 혁명군(BRA)의 위치에 대한 첩보 부족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내며 실패했다. 1996년 9월, 부건빌 혁명군 전투원들은 지역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캉구 해변의 파푸아뉴기니 육군 주둔지를 공격하여 12명의 병사를 죽이고 5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는 내전 중 파푸아뉴기니군이 단일 작전에서 입은 가장 큰 손실이었다. 그 다음 달에는 시어도어 미리웅이 암살되었다. 이후 독립적인 조사를 통해 파푸아뉴기니군과 저항운동 민병대 소속 군인들이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다. 파푸아뉴기니군 내의 군기와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고, 공격 작전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8월에 철수했다.

줄리우스 찬 총리는 팡구나 광산을 되찾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책은 샌드라인의 용병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1997년 1월에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용병 고용 계획이 호주 언론에 유출되면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파푸아뉴기니군의 지휘관인 제리 싱기로크는 처음의 입장을 뒤집어 용병 사용에 반대했고, 용병들이 도착하는 대로 구금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파푸아뉴기니는 군사 쿠데타 직전까지 갔으며, 국회가 시위대와 군인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호주 정부는 샌드라인과의 계약을 종료하도록 파푸아뉴기니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용병들이 사용하려던 중장비들을 중간에서 차단했다. 결국 줄리우스 찬 총리는 사임하고 용병들은 파푸아뉴기니 영토에서 퇴출되었다.

4. 평화 협상과 부건빌 자치정부 수립 (1997년~2005년)

1997년 빌 스케이트 총리 취임과 함께 평화 협상이 본격화되었고, 1998년 링컨 협정으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99년 1월, 존 모미스 주지사의 부건빌주 지방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부건빌 혁명군(BRA)과 부건빌 과도정부(BTG)의 반대로 기능이 정지되었다. 이후 부건빌 제헌의회와 부건빌 인민의회 선거를 통해 새 정부 구성 합의가 이루어졌고, 5월 선거에서 조지프 카부이가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존 모미스는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했고, 11월 모미스를 수장으로 하는 부건빌 임시지방정부가 세워졌다. 샘 카우오나와 모미스의 화해로 두 조직은 상호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2000년대 초, 부족 단위의 체계적인 화해 절차가 시작되었다.[25]

2001년 평화 조약으로 부건빌 자치정부 수립 계획이 제시되었다.[24] 프란시스 오나는 평화 노력에 불참, 소수 전투원과 함께 부건빌 혁명군에서 탈퇴했다.[25] 그는 새 정부 참여 제안을 계속 거부, 광산 인근 지역을 점거하고 통행을 불가능하게 했다. 2005년 말라리아로 사망하기 전, 스스로를 부건빌의 ‘왕’으로 선포했다.[24][25]

1998년 아라와에서 분쟁으로 파괴된 구급차

4. 1. 평화 협상의 시작

빌 스케이트가 파푸아뉴기니 총리로 당선되면서 평화를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군사적 해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97년 중반, 호니아라와 뉴질랜드 번햄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이 이루어졌고, 부건빌섬을 비무장화하자는 합의가 도출되었다.[23] 이에 따라 뉴질랜드가 주도하고 호주, 피지, 바누아투가 지원하는 비무장 상태의 휴전감시단이 섬에 파견되었다.[23]

그 뒤로 섬에서는 대부분 휴전 상태가 유지되었다. 오나와 입장을 달리하면서 카부이와 카우오나는 스케이트 정부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열린 평화 회담에 참여했고, 이 회담은 1998년 1월 링컨 협정 체결로 이어졌다.[24] 협정 내용에 따라 파푸아뉴기니 병력은 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부건빌 혁명군과 부건빌 저항운동을 무장 해제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호주가 주도하는 다국적 평화감시단이 파견되어 휴전감시단을 대체하였다. 부건빌 화해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법안이 파푸아뉴기니 국회에 제출되었지만 1998년 12월에 부결되었다.[25]

4. 2. 링컨 협정과 평화감시단 파견

빌 스케이트 총리가 선출되면서 평화를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1997년 호니아라뉴질랜드 번햄에서 회담이 열려 휴전이 체결되었고, 부건빌섬 비무장화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오스트레일리아, 피지, 바누아투가 지원하는 비무장 휴전감시단(TMG)이 파견되었다.[23] 이후 섬에서는 대체로 휴전이 유지되었다. 프란시스 오나와 결별한 조지프 카부이와 샘 카우오나는 1998년 1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스케이트 정부와 평화 회담을 가졌고, 이는 링컨 협정 체결로 이어졌다.[24] 링컨 협정에 따라 파푸아뉴기니 정부군은 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부건빌 혁명군(BRA)과 부건빌 저항군(BRF)의 무장 해제를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오스트레일리아 주도의 다국적 평화 감시단(PMG)이 파견되어 휴전감시단을 대체했다. 1998년 12월 파푸아뉴기니 의회에서 부건빌 화해 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법안은 부결되었다.[25]

4. 3. 부건빌 자치정부 수립

2001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부건빌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제시되었다.[24] 그러나 프랜시스 오나는 평화 협상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소수의 전투원과 함께 부건빌 혁명군에서 탈퇴했다.[25] 이후에도 그는 새로운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계속 거부했고, 광산 근처의 한 지역을 점거하여 통행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는 2005년에 말라리아로 사망하기 전에 스스로를 부건빌의 ‘왕’으로 선포했다.[24][25]

첫 부건빌 자치정부 선거는 2005년 5월과 6월에 열렸고, 조세프 카부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24]

5. 독립 주민투표와 미래 (2005년~현재)

평화 협정에는 부건빌의 정치적 지위에 관한 주민투표를 2015년에서 2020년 사이 어느 시점에 시행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독립 주민투표 결과, 주민 절대다수가 독립에 투표했다.[28][29] 2021년 7월, 파푸아뉴기니 정부와 부건빌 정부는 부건빌이 파푸아뉴기니 정부의 승인을 조건으로 2027년에 독립을 획득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15][16]

5. 1. 독립 주민투표 실시

2016년 1월 부건빌 자치 정부와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건빌 주민투표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위원회는 2019년에 부건빌의 미래 정치적 지위를 결정할 투표를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27] 2019년 11월 후반과 12월 초반에 법적 구속력이 없는 독립 주민투표가 시행되었고, 주민 절대다수가 독립에 투표했다.[28][29]

5. 2. 독립 협상과 과제

2016년 1월 부건빌 자치 정부와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건빌 주민투표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위원회는 2019년에 부건빌의 미래 정치적 지위에 대한 투표를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27] 2019년 11월 말과 12월 초에 구속력이 없는 독립 주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주민 절대다수가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28][29]

2021년 7월, 파푸아뉴기니 정부와 부건빌 정부는 부건빌이 파푸아뉴기니 정부의 승인을 조건으로 2027년에 독립을 획득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15][16]

6. 한국과의 관계

부건빌 내전과 관련하여 대한민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나타나 있지 않다.

참조

[1] 서적 De facto states: the quest for sovereignty Routledge 2004
[2] 웹사이트 The Bougainville Referendum And Beyond https://www.lowyinst[...] Lowy Institute 2019-10-08
[3] 웹사이트 Origins of the Bougainville Conflict http://dl.nfsa.gov.a[...] National Film and Sound Archive of Australia 2013-06-16
[4] 웹사이트 The origins of the conflict http://www.c-r.org/a[...] Conciliation Resources 2013-06-16
[5] 웹사이트 Pacific patrol boat program http://nautilus.org/[...] Nautilus Institute 2015-08-07
[6] 뉴스 Battle intensifies over Bougainville copper http://www.theaustra[...] News Corp Australia 2011-07-16
[7] 뉴스 Bougainville at a crossroads: independence and the mine http://www.abc.net.a[...] Australian Broadcasting Commission 2015-08-07
[8] 문서 Agreement between Papua New Guinea and Fiji, Tonga, Solomon Islands, Vanuatu, Australia and New Zealand, concerning the status of elements of the defence forces of those countries deployed in the North Solomon's Province of Papua New Guinea as part of the South Pacific Peacekeeping Force (1994) PITSE 18 (28 September 1994) http://www.paclii.or[...] Pacific Islands Legal Information Institute
[9] 웹사이트 Bougainville – The Man Who Would Be King (Transcript) https://web.archive.[...] Australian Broadcasting Commission 2015-08-09
[10] 뉴스 Ona's death paves way for mining to resume http://www.smh.com.a[...] The Sydney Morning Herald 2015-08-09
[11] 보도자료 Bougainville: UN Asks for Invitation to Investigate Mercenaries http://www.unpo.org/[...] Unrepresented Nations and Peoples Organization (UNPO) 2015-08-07
[12] 웹사이트 Signing paves way for Bougainville independence vote http://www.radionz.c[...] 2017-05-19
[13] 뉴스 Bougainville referendum: PNG region votes overwhelmingly for independence https://www.bbc.com/[...] 2019-12-11
[14] 뉴스 Bougainville referendum: region votes overwhelmingly for independence from Papua New Guinea https://www.theguard[...] 2019-12-12
[15] 웹사이트 PNG, B'ville agree on latter's independence https://postcourier.[...] 2021-07-07
[16] 웹사이트 Bougainville independence: recalling promises of international help https://www.lowyinst[...] 2021-12-03
[17] 웹사이트 Andrew Adamson to direct adaptation of Mister Pip http://www.screendai[...] 2016-04-09
[18] 웹인용 Origins of the Bougainville Conflict http://dl.nfsa.gov.a[...] National Film and Sound Archive of Australia 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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